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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07 회차 산행 : 양평 금왕산 일대   =

◎ 양평 금왕산 일대 : 2025년 3월 31일(월)

ㆍ 산행코스 : 양동역~349번지방도~건지산~349번지방도~금왕사~임도~금왕산~임도~349번지방도~매곡역

ㆍ 참가인원

: 하늘금 홀로

ㆍ 산행시간

: 5시간 55분

ㆍ 집결지(시각)

: 양동역 (10:50)

ㆍ 산행거리

: 17.85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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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1 등 록 일 2025. 4. 2 (수) 오전 1:53:30
글쓴이 하늘금(shins@shins.or.kr) 수정/삭제

 

양평 금왕산 일대(양동역~건지산~금왕사~임도~금왕산~임도~매곡역)
[ 2025. 3. 31 ]

구 간 요 강

1. 서울 - 양동역 교통편
1) 2025년 3월 31일(월) 청량리역09:57 -> 10:46양동역 : 무궁화(3,400원)

2. 산행코스
2025년 3월 31일(월) 총소요: 5시간 55분(산행거리 : 17.85km)

양동역~349번지방도~건지산~349번지방도~금왕사~임도~금왕산~임도~349번지방도~매곡역

3. 매곡역 - 서울 교통편
1) 2025년 3월 31일(월) 매곡역17:01 -> 18:04청량리역: ITX새마을(4,600원)

특 이 사 항

※ 며칠전부터 발목이 시큰거리는 통증이 있었으나 예전에도 경험한적이 여러번 있었고 오히려 산행 후 호전되기도 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산행 강행하기로 하였으나 산행내내 불편하였고 금왕산 하산하여 349번 도로에 내려서서는 좌우 허벅지 뒤쪽에 경련이 오면서 도저히 걷기가 힘들어 원래 삼각산(538.2m)과 수리봉(461.2m)을 거쳐 일신역에서 산행 마치려 헸던 계획은 포기하고 349번 도로 따라 매곡역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산  행  길



산 행 일 지


▼ 10:55 양동역 산행 시작 ~ 11:06 [0.68km] 양동면사무소

양동역에서 내린 후 곧장 난 서쪽 방향 도로를 따르면서 10:55 산행 시작하여

10:57 우틀하여 2차선 도로를 따라 북진하다보면

도로 우측 중앙선 철로와 같이 가고

11:06 [0.68km] 양동면사무소 앞을 지나간다.


▼ 12:10 [3.92km] 건지산(266.7m) 정상

11:08 [0.87km] 도로 좌측에서 진입한 349번 지방도로에 합류하여 대체로 북북서진하고

11:14 [1.34km] 도로가 우측(동쪽)으로 휘면서 중앙선 철로 아래를 교차 통과하면 11:16 [1.45km] 회전교차로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 다시 북북서진하는 것이고

진행 방향으로 건지산 경사가 심상치 않아 보이고 뒤쪽 멀리 수리봉도 우뚝 솟은 모습이다.

11:23 ㅏ자형 삼거리에서 직진하는데 우측에 [양평의병묘역]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조금 더 북진하면 11:24 도로 좌측편에 있는 석곡2리 사이실마을 표지석 한면은 [을미의병발상지]라고 적혀있다.

을미의병[ 乙未義兵 ]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

<내용>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켰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뒤이어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보수유생들은 ‘토역소(討逆疏)’ 등을 바쳐 친일정부의 폐위조처에 반대함은 물론, 일본군을 토벌, 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8월 22일 서울 창의소(倡義所)에는 고시문이 나붙기 시작하고, 10월 중순을 전후로 충청남도 회덕·유성·진잠 등지에서는 문석봉(文錫鳳) 등이 토적(討賊)의 뜻을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친일정권이 공포, 시행한 단발령은 유생들과 일반백성의 반일·반정부 기운을 더욱 고조시켰다. 1896년 1월 중순 경기·충청·강원도 등 각 지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난 의병항쟁은, 2월 상순에는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그리고 함경도 북부까지 확대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갑오경장의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는 관찰사·군수 혹은 경무관·순검 등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처단하거나 문책하고, 또 그들을 진압하려는 관군 및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아울러 전선·철도 등 일본군의 군용시설을 파괴하거나 일본군 주둔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경기도에서는 이천과 여주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1월 15일을 전후로 봉기하여 남한산성 서남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다. 그 뒤 두 지역의 의병이 통합하여 2,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박준영(朴準英)이 대장, 김하락(金河洛)이 군사 겸 도지휘(軍師兼都指揮)가 되었다. 2월 25일 의병부대가 남한산성에 입성하자, 안성 의병 수 백명과 춘천 의병 3,000여 명도 남한산성으로 집결한다는 소문으로 친일정부를 긴장시켰다.

강원도 춘천에서는 이항로(李恒老) 문인 이소응(李昭應)이 의병 1,000여 명을 규합하여 춘천부를 점거하고 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처치하였다. 강릉에서는 여주 유생 민용호(閔龍鎬)가 원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활동함으로써 의병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영동 9 군창의진(嶺東九郡倡義陣)이 편성되었다.

충청도 홍주에서는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이설(李설)·안병찬(安炳瓚) 등이 기병하여 한때 그 일대를 지배하였고, 제천에서는 유인석이 그의 문인 서상렬(徐相烈)·이필희(李弼熙) 등과 함께 기병하여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을 편성하였다. 그 뒤 창의진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일부 의병과 합류하면서 병력이 4,00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체포하여 처치한 뒤 충주부를 점거하여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였다. 이때 유인석은 〈격고내외백관 檄告內外百官〉이라는 격문을 공포하여 나라의 모든 관리들은 친일행위를 중지하고 의병을 후원하여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좌창의진이 충주부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처 의병들의 기세가 높아지고 충주부로 몰려오는 의병도 늘었다.

경상도의 경우 산청에서는 곽종석(郭鍾錫) 등 200명의 유생이 의병진을 편성하여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權世淵)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 10여 일 동안 사방에서 모여든 의병이 무려 4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훈련을 받지 못한 의병들이었기 때문에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결국 안동부도 빼앗겼다.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許蔿) 등이 의병을 일으켜 금릉 등지를 점령하고 대구에 다다랐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해산하였다.

끝으로 전라도의 의병봉기는 다른 지방보다 약간 늦은 3월에 시작되었다. 나주의 기우만(奇宇萬) 등은 각처의 의병을 광주로 집결시켜 호남창의군을 편성하였으나 역시 관군의 공격을 받고 해산되었다.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 봉기에 당황한 친일정부는 여러 차례 조칙을 반포하고 선무사(宣撫使)를 파견하는 한편, 서울수비의 주력부대를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을 서둘렀다. 이 틈을 타서 근왕세력인 정동파(貞洞派)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친러정권은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친일내각의 요인들을 ‘역당(逆黨)’ 또는 ‘국적(國賊)’으로 단죄하고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갑오년 이래의 동란(動亂)과 개혁으로 인한 경제파탄과 민생고의 극심함을 고려하여 그동안 적체된 각종 미수·미납의 공세(貢稅)를 일체 탕감한다는 조처도 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은 의병 봉기의 대의명분을 없애버렸으며 그들을 해산시키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 결과 1896년 3월 이후 의병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회유정책을 거부한 유인석과 민용호 부대는 만주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을미의병은 비록 ‘근왕창의’라는 왕조 중심적이며 위정척사론적인 사상적 한계성을 탈피하지는 못하였으나, 청일전쟁 중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농민운동에 뒤이어 임진왜란 이래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의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을미의병 [乙未義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금 더 진행하면 11:26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楊東己未獨立萬歲運動記念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양동만세공원]이라 하고 좌측편 구석에는 [석곡리(石谷里)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이 자리하고 있다.

양평 석곡리 석조약사여래좌상[ 楊平石谷里石造藥師如來坐像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楊東面) 석곡리(石谷里) 섬실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불.

석곡리 섬실마을의 섬실장로교회가 있는 능선 하단의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약 150m 가량 들어서면 서쪽에 파란색 지붕의 빨간 벽돌 건물이 보인다. 석불은 이 건물 안에 안치되어 있다. 원래 섬실마을 입구에 있었으나 1995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마을 노인들이 1년 중 설을 전후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세부 사항을 파악하기 어렵다. 목이 부러져 시멘트로 붙여 놓았으며, 왼쪽 어깨 부분과 무릎 부분 또한 시멘트를 발라 보수해 놓은 상태이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추정되며, 두 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한 왼손에 둥근 지물이 올려져 있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올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앉은 모습은 오른다리를 앞으로 하여 가부좌를 한 길상좌(吉祥坐)이다.

조성연대는 하한을 조선 후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91㎝, 무릎 너비 66㎝, 어깨 너비 53㎝, 얼굴 너비 21㎝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평 석곡리 석조약사여래좌상 [楊平石谷里石造藥師如來坐像]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계속해서 349번 도로 따라 북북서진하면 건지산이 가깝게 바라 보이고

11:42 [3.20km] 349번 도로 좌측 이면도로로 들어간 후

11:46 민가 몇 채 보이는 좌측으로 들어가 민가 사이 텃밭을 지나

11:47 우측에서 들어온 소로 만나 좌측으로 진행하면 컨테이너 건축물을 만나고 산쪽으로 들어가

비포장 임도 따라 살짝 올라가면 11:53 능선은 잡목이 가로막혀 비탈을 올라가야 하는 지점에서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고 11:57 산행재개한다.

비탈을 올라 좌측 능선 따라 올라가는데 엄청나게 가팔라 한발짝 한발짝이 너무 힘들고

경사가 누그러지자 12:10 치성 바위 뒤편 산불감시초소를 지나가면

12:10 [3.92km] 망루형 산불감시초소 세워진 건지산(266.7m) 정상에 도착한다.

건지산[ 建指山 , Geonjisan ]

경기도 양평군의 양동면 금왕리와 석곡리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고도:266m).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건지산(建智山)으로 산세가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 상동면 산명에서 건지산이 조현리에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건지산 [建指山, Geonjisan]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12:17 오던 방향으로 출발


▼ 14:24 [9.72km] 금왕산(486.7m) 정상

올랐던 방향으로 진행하다 좌측 사면을 거친 다음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는데 오를 때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에 쩔쩔매게 되고

절벽 사이 양봉통 놓인 틈새를 지나 가까스로 내려가 12:34 [4.43km] 논두렁 길을 거쳐 이어진 개천변 비포장길을 따라 북진하다

12:39 좌측 개천 다리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서

방금 미끄러 내려온 무지막지한 경사를 가진 건지산을 바라보고

12:44 [4.99km] 헤어졌던 349번 도로를 다시만나 좌틀한다.

이제 349번 도로는 거의 정북으로 진행하는데 진행 방향으로 우측 삼각산과 좌측 수리봉이 제법 당당한 모습으로 바라 보이고

12:59 [5.98km] ㅓ자형 삼거리에서 직진하는데 좌측 방향으로 [국립양평 치유의숲 2.4km]가 안내되었고 [금왕보건진료소]도 같은 방향이라고 알려준다.

13:02 [6.08km] 349번 도로를 버리고 우측 금왕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곧바로 금왕사가 보여 안으로 들어가니 아주 작은 암자 형태의 사찰이나

위쪽으로 보이는 널따랗게 닦은 터는 금왕사 건립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13:11 골짜기 따라 고도 높혀 올라가는 임도에 전원주택을 지나면 더욱 경사가 가팔라지고 임도에서 조금 떨어진 안쪽으로 민가 두 채가 보이고

이제 임도는 없어지고 보통의 등로가 이어가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게단식 비탈이 보이는데 누군가 목적이 있어 터를 만들었으나 방치되는 바람에 잡목들이 점령한 듯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13:28 [7.15km] 폐가 한 채 보이는 지점에서 금왕산 정상 방향을 가늠하고 좌측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사라진 등로는 다시 살아나고 가팔라진 오르막에 방치된 들짐승 포획틀은 망가져 방치되었고

한바탕 가파르게 오르면 13:35 [7.29km] 예기치 않은 산간 임도를 만나 정상 방향은 아니나 일단 우측으로 진행한다.

임도 따라 남동진하다 임도 갈림길에서 좌측 임도로 진행하면

부러진 잣나무들이 도로를 막아선 곳이 수차례 나타나고

금왕산 정상을 북쪽에 두고 남쪽에서 동진하다가  금왕산 남쪽 산자락에 이르러 금왕산으로 오르기 위해 더는 임도를 따르면 안될 것이라 판단하여

14:04 [9.10km] 좌측 절개지로 올라가기로 한다.

절개지를 극복하여서도 가파르게 올라가면 사람의 흔적이 나타나고 금왕산 정상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아 보이는데 가파른 오름에 기진맥진하고

바위 지대를 지나면서 경사가 조금 누그러지자 힘을 내어 올라가면

14:24 [9.72km] 마침내 금왕산(486.7m)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준비해간 빵과 바나나로 요기하고 14:38 두갈래 능선 갈림에서 좌측으로 출발


▼ 16:50 [17:85km] 매곡역 산행 종료

펑퍼짐한 좌측 능선으로 진행하면 잣나무 군락지가 이어지고

가파른 내리막 능선을 미끄러지면 임도가 내려 보이나 성가신 잡목을 헤치며

14:56 [10.41km] 임도로 내려가 우측으로 진행한다.

골짜기 사면으로 난 임도는 대체로 북진하가다가 좌측으로 꺾어가는데

좌측 아래로는 몇 채 되지 않은 마을이 내려보이고

15:11 [11.27km] 포장 임도 만나 좌측으로 진행하면 이제 대체로 서진하게 된다.

진행 방향으로 보이는 삼각산이 왜 삼각산인지 알 것 같은 모습이고

115:31 [12.60km] 다시 349번 지방도로 만나 삼각산 수리산은 부상으로 포기하기로 하고 좌틀해 남진하다

15:41 [13.13km] 금왕사 입구 갈림길에서 좌우 허벅지 뒤쪽에 경련이 올라오면서 도저히 걸을 수 없어 앉아 아픈 부위를 마사지하여 상태가 나아지자 15:45 산행 재개한다.

지루하게 남진하는 349번 도로 따라 진행하면 우전방으로 북진하면서 올랐던 건지산이 낮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바라 보이고

건지산 동쪽 자락을 잘라 끊고 올라가는 349번 도로가 16:11 고개마루를 지나 내려가면

16:17 건지산 올랐던 갈림길을 지나가게 되고

16:29 [16:24km] 매곡역으로 가기위해 349번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진행하다

16:31 우측으로 꺾어 진행하면 서진하는 2차선 [매월길]이고 16:34 고개마루를 넘어가

16:42 중앙선 철로 아래를 교차 동과한 다음 16:46 삼거리에서 우측 소로로 진행한다.

16:49 우틀하여 다리를 건너면 매곡역이 바라 보이고

16:50 [17:85km] 매곡역에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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